


죽음을 찬양하라: 최은철의 급진적 허무주의에 관하여
정강산 (독립연구자)
“우리는 갑자기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매일 죽어간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Lucius Annaeus Seneca)
일전에 나는 최은철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포착되는 것은 ‘문명’과 ‘시간’에 대한 다소 비관적인 논평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가 작업을 통해 내비치는 시선에 일단 우리가 접속하게 되면, 인간의 역사를 이루는 견고한 모든 것들이 덧없음과 허망함 속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심상이 어른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심상은 압축된 개념어와 같은 깔끔하고 쨍한 미감으로 구성된 최은철 특유의 ‘시간적 조각’을 통해 조형되는 것인데, 이는 주로 가변성이 큰 재료로 문명의 상징물을 연출한 뒤 그것을 자연적인 시간에 노출시킴으로써 발생하는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추상 수준을 한 단계 높여보면, 예의 시간적 조각은 ‘무상함’과 ‘허무’ 너머 보다 근원적인 항들에 대한 입장을 섬세하게 전제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요컨대 최은철의 작업은 ‘영원’, ‘무한’, ‘영생’에 관한 논평인 동시에 ‘필멸’, ‘유한’, ‘죽음’에 관한 정제된 산문(essay)이기도 하다.
전시 《그대,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술적 제언》에서 그가 제시한 <설탕도시(Sugar City)>(ver.2025), <크랙(Crack)>(2016-2023) 연작,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Unhistorical Artifact)>(ver.2025)은 이 같은 심증을 보다 확고히 해준다.
최은철, <설탕도시> ver.2025, 좌대 위에 각설탕, 설탕설치, 가변크기, 청주시립오창전시관
우선 각설탕을 통해 고층빌딩과 빽빽한 주거단지의 모습을 미니어처 파노라마의 형태로 의태한 설치작업 <설탕도시>는 실로 도시문명에 관한 감각적이고도 현상학적인 체험의 조형이라 할 법한 것이다. 켜켜이 쌓인 채 제 결정(crystal)을 번뜩이고 있는 설탕 조각들은 직관적인 달콤함을 과시하며, 압도적인 풍족함으로 고열량의 미래를 약속한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대도시의 번화가를 거닐 때 공기처럼 감지되는 충족감에 조응하는 미적 감응이다.
이 같은 감응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명이 약속하는 ‘영원한 것’에의 심상과 관련된다. 기술의 발전은 계속될 것이고, 경제적 성장 또한 항구적일 것이며, 인류의 종적 보전 역시 우주의 끝까지 이뤄지리라는 믿음과 같은 것이, 도시의 웅장한 건축물들과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들 아래서는 일종의 필연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자본이 화폐를 경유하여 자신의 무한한 증식을 꾀하듯, 문명은 도시를 경유하여 자신의 무궁한 진보를 관철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리하여 도시에서 일상을 수행할 때, 예컨대 커피를 마시거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거나, 사람들이 붐비는 식당에 들어가거나, 유리창 너머 진열된 디저트를 살펴보거나, 인파에 섞여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차의 소음을 배경으로 서로를 흘깃 보고 스쳐가거나, 주식을 매수하고 배달음식을 기다리거나, SNS 피드를 넘길 때, 우리는 주술처럼 오늘과 같은 내일이 반복될 것을 행함으로써 믿으며, 부지불식간 문명의 존속에 베팅하게 된다.
그러나 시점(point of view)의 위상을 미세하게 이동시키자마자 문명은 참을 수 없는 취약함 속에 놓여있음이 드러난다. 약 1억 6천만 년 동안 지구를 지배한 공룡이 단 한 번의 운석 충돌로 멸종에 접어들었다는 자연사적 사실은 현생 인류가 등장한 약 30만 년의 시간, 문명사로는 고작 1만 년 남짓의 시간을 무색하게 한다. 더불어 대공황과 전쟁처럼 문명에 내속적인 계기들은 어떤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과잉생산된 상품들이 소비의 위축으로 더 이상 사회 내에서 소화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세계 전역에서 터져 나오는 파산과 실업은 문명의 물적 토대를 순식간에 허물어뜨리지 않는가? 인플레이션과 실업, 식량난이 극심해지며 사회 전반에 절망과 불신이 팽배하게 될 때 등장했던 파시즘·나치즘(혹은 트럼피즘)은 문명의 자기모순이 어디까지 인간을 끌어내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가.
최은철, <설탕도시> ver.2025, 좌대 위에 각설탕, 설탕설치, 가변크기, 청주시립오창전시관
그런 점에서 <설탕도시>는 고체이지만 끊임없이 녹고 변형되는 물성을 지닌 설탕의 유기물적 형질을 통해 문명의 모순을 집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콤한 문명의 성채는 ‘영원’, ‘무한’, ‘영생’을 약속하는 그 순간조차 공기 중 수분을 끌어들여 스스로 녹아내림으로써 형태를 잃으며 또 다른 상태로 진입한다. 그렇게 형상(form)을 입었던 것이 질료(matter)로 다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설탕의 엔트로피(entropy) 증가는 그 달콤함 속에서 아이러니한 ‘필멸’, ‘유한’, ‘죽음’을 환기하는 것이다.
한편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도 비슷한 심상을 전달한다. 여기서 최은철은 고대 그리스 조각상, 고려 전기의 청자 향로, 조선 시대의 백자 등을 의태한 조각을 제작하여, 바닥 면에서 은은한 조명이 나오는 고급스러운 진열장 위에 배치한다. 그러나 설탕으로 제작된 그들 오브제의 물성은 전시장의 온도와 습도, 조명의 열기에 의해 무너져내리며 유기체에 가까운 모습을 연출하게 된다.
으레 ‘유물(artifact)’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의 시간을 견디고 현대에 도착한 내구성 좋은 오브제라는 점에서 문명의 영원한 위용 그 자체를 투명하게 보증하는 지표(index)가 되지만, 최은철은 이미 그와 같은 유물조차 녹아 사라져버린 억겁의 시간성을 앞당겨 보여준다. 요컨대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역사에 착근된(embedded), 역사를 위한 유물은 절대적인 시간의 행진 속에서 끝내 역사를 초탈하여 비(non) 역사적인 유물이 될 운명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최은철, <역사적이 않은 유물> ver.2025, 라이트 박스 위 설탕캐스팅 조형물, 이소말트 & 식용색소, 가변크기, 청주시립오창전시관
이 같은 방식으로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은 일순간 현재의 모든 것을 아득한 과거로 밀어내며 머나먼 미래의 시선과 같은 것을 발생시킨다. 그러한 시선 속에서 오늘의 단단한 것들은 죽음과 필멸을 향해 천천히 행진하고 있다.
최은철이 강조하는 유한성의 인식은 물론 “무상함, 무용함, 덧없음, 허무”의 감응 주변으로 순환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자포자기의 무력함을 동반한 문명의 광란적 향유가 도출될지, 현재의 모든 문명적 ‘관행’을 거부하는 급진적 중단이 도출될지는 명확히 표현되지 않으며, 가능한 양 항은 수용자에게 남겨진 이지선다로 유지된다.
최은철, <크랙 IV> .2023, 종이 위에 유성색연필, 150x150cm, 청주시립오창전시관
그런 점에서 <크랙> 연작은 이들 ‘죽음’에의 성찰을 시도하는 작업을 ‘급진적 중단’으로 유도하고 정박시키는 의미론적 닻(anchor)을 형성하는 것 같다. 예의 <설탕도시> 너머로 보이는 <크랙> 연작은 북극곰 수백 마리가 조각난 빙산(iceberg)의 형상으로 극지방의 수면 위를 부유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균열’을 뜻하는 영어 ‘크랙(crack)’이 명확히 지시하듯 빙하(glacier)는 무수한 빙산으로 갈라져 있다. 여기서 북극곰은 빙산 조각들에 강력히 착근되어 있어 도무지 분리 불가능한 모습으로, 요컨대 북극곰이 빙산이며 빙산이 곧 북극곰인 바의 사태를 가리키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결국 최은철은 유한성과 죽음의 인식을 통해 문명의 부정적 외부효과를 넌지시 지시하며 모종의 중단을 촉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설탕도시>가 달콤한 환각으로 빛나며 천천히 녹아 사라지는 가운데, <크랙>은 그에 대구(parallelism)를 이루며 문명이 미처 고려할 필요가 없었던 존재들이 조용한 비명을 지르는 장면으로 치닫는 것이다. 이로부터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면,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직시하는 편이 좋다’는 ‘제언’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그런 점에서 최은철의 허무에는 얼마간 급진적인 뉘앙스가 두드러지며, 이는 하이데거가 구상한 분위기(Stimmung)론이 가닿을 수 있는 생산적 경로를 압축적으로 선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개진한바, 분위기는 단순히 심리적인 상태나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에 던져져(Geworfenheit) 있음을 드러내는 존재론적 조건과도 같다. 분위기는 현존재가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즉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채 어떤 상황 속에 내던져져 있음을 가장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방식이다. 특정한 사건을 전제하는 ‘감정’과 달리, 특별한 이유 없이 찾아오는 막연한 불안(Angst)이나 권태(Langeweile)는 그가 예시하는 대표적인 분위기에 해당한다.
최은철, 흘러내리는 유물들 (melted artifact ) 2022, 타임랩스 비디오 3 min 49sec
최은철, <역사적이 않은 유물> ver.2025, 라이트 박스 위 설탕캐스팅 조형물, 이소말트 & 식용색소, 가변크기, 2주차 전시과정 청주시립오창전시관
불안은 대상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 속의 어떤 존재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존재자 전체의 무의미함(Nichts)에 대한 불안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안이라는 분위기는 현존재를 잡담, 흥미, 도파민으로 가득한 일상적인 몰두에서 벗어나게 하여, 자신의 가장 고유하고 궁극적인 가능성, 즉 죽음을 향한 존재(Zum-Tode-Sein)라는 본질과 마주하게 한다. 권태 역시 단순한 따분함을 넘어, 존재자 전체가 현존재에게 더 이상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는 상태로서 시간 자체가 느리게 흐르거나 멈춘 듯한 느낌을 주는바- 이 같은 권태는 우리를 ‘그저 존재하는 상태’를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본질적 물음’으로 이끈다. 그리하여 불안과 권태는 현존재에게 익명의 세인(世人; das Man) 내지 타자의 규범과 패턴에 잠식된 비본래적인(Inauthentisch) 삶을 버리고 죽음을 직면하는 본래적인(Authentisch) 실존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부름’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논리 구조는 최은철이 압도적인 시간의 파도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도달하는 ‘급진적 허무주의’와 완벽히 상동적이다. 필멸과 죽음에 대한 인식은 문명의 시간을 절대(the absolute)의 영역에서 끌어내려 무의미함에 정박시키며, 이는 생활세계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불안과 권태의 정동을 계시한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 자신의 유한성을 자기 인식하는 현존재는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정립함으로써 상이한 존재의 지평으로 나아간다.
물론 혹자는 이 같은 공시적(synchronic)이고 초역사적인 접근이 불안이나 권태와 같은 분위기, 허무를 자연화하는 데에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죽음과 유한성에 대한 강조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 산물이라면,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그와 같은 분위기가 출현하게 되는지를 살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하나의 답으로 제시된 급진적 허무주의는 존재의 초역사적 실체라기보다 개인이 특정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 하에서 경험하는 소외와 계급 모순의 반영이자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는 내가 한때 최은철의 허무가 “비트코인, 주식, 부동산, (...) MBTI, 자기계발서, SNS, 선진국, 대기업(...), 한미동맹, 자유시장 경제와 같은” “동시대인들이 섬겨 마지않는 표상들”을 상대하길 기대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허무주의와 구체적인 시대에 착근된 허무주의는 그 형식에서 각각 ‘존재론적 계시’와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상이한 경로로 분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나는 최은철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보고 싶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존재론적 단절을 만들어내는 계시 없이 이뤄지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얕음과 그 공허함, 관성을 떠올려본다면 최은철의 시간적 조각은 이미 그 자체 특정의 사회적 체계에 대한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비판을 완전하게 하는 충만한 작인(agent)이기도 하다. 존재론적 계시와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상보적이다. 무한과 영원에 취한 동시대는 어쩌면 필멸의 운명을 환기하는 최은철의 급진적 허무주의가 인도하는 계시의 장소를 더욱 필요로 한다.
최은철, <역사적이 않은 유물> ver.2025, 라이트 박스 위 설탕캐스팅 조형물, 이소말트 & 식용색소, 가변크기, 청주시립오창전시관
[부록]
영원한 로마(Eternal Rome)
정강산
이탈리아 수도, 로마의 좁은 골목.
오래된 아파트 건물의 페인트가 벗겨진 벽 아래 리카르도(Riccardo)는 서 있었다.
하루 종일 반복되는 아르바이트에도 돈은 손에 남지 않고, 방세와 공과금은 매달 지옥처럼 쌓인다. 커피 한 잔, 작은 빵조각조차 사치가 된 지 오래다.
스마트폰 화면 위 뉴스 속 정치인들의 웃는 얼굴을 훑고 지나간 그의 시선은 벽에 붙은 화려한 관광지 사진에 머물렀다.
친구들은 이미 더 나은 삶을 찾아 외국으로 떠났지만, 그는 남아 단절과 고립 속에서 반복되는 하루를 견딘다. 식탁에는 매일 같은 인스턴트 파스타와 식료품 가게에서 할인된 채소가 전부다.
밤이 되면 TV에서는 또 다른 행복한 삶이 흘러나왔으나, 그는 불 꺼진 방 안에서 고요히 분노를 불태우며 SNS 게시물들에 아프리카 및 중동계 이민자들을 욕보이는 댓글을 달기 바빴다.
그는 자신의 삶, 나아가 유럽의 몰락이 이민자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소문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불 꺼진 방에서 핸드폰을 쥔 채 손가락을 바삐 움직여 분노를 표출하던 날.
그는 문득 쏟아지는 잠에 의아함을 느끼며 비몽사몽 꿈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내 꿈속에서 그는 수천 명의 군중 사이에 끼어있었다. 숨 막히는 답답함에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하나의 목소리가 대기를 찢고 나왔다.
“Ave! 로마 시민이여! 그리고 위대한 제국의 백성들이여!”
우리의 심장, 영원한 도시 로마의 심장박동을 느끼는가!
이 순간, 나는 바로 여러분의 황제,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섰노라.
우리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다. 세상을 정복한 뒤 역사의 대리석에 문명을 새기는 조각가이다!
우리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신들의 뜻을 담은 로마법(Lex Romana)을 만들었다. 이 법은 모든 시민을 보호하며, 야만의 힘이 아닌 지혜와 정의로 제국을 다스리는 기초이다.
우리가 정복한 모든 땅에 이 법을 심어, 파멸 대신 평화의 질서를 구축했노라!
보라, 우리의 건축물을, 시골의 작은 마을까지 연결되는 포장도로(Via Romana)의 위용을! 이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로마의 심장과 제국의 끝을 잇는 생명선이다!
우리의 수로(Aquaeductus)를 보라! 산과 계곡을 가로질러 깨끗한 물을 이 도시에 공급하니, 이는 자연의 장벽을 굴복시킨 인간 지성의 승리가 아니던가! 모든 시민은 깨끗한 물을 마시며, 우리 목욕탕(Thermae)에서 문명을 누린다!
우리는 그리스의 철학과 이집트의 지식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이 도시는 단순한 행정의 중심이 아니라, 예술과 지식의 등불이다.
나는 곧 연주하고, 시를 읊으며, 로마를 찬란한 예술의 전당으로 만들 것이다.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움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대들 중 일부는 불안을 말하고, 어려움을 호소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위대한 문명은 역경 속에서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유산을 지키고, 더욱 찬란한 미래를 만들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
나는 이 제국의 안녕과 영광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로마 시민이여, 긍지를 가져라!
우리의 문명은 지상의 그 어떤 왕국보다도 견고하다.
우리의 법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우리의 예술은 별처럼 빛날 것이다.
“로마여, 영원하라! Pax Romana!”
네로의 외침에 문득 어렴풋이 깨어난 리카르도는 베실베실 미소를 짓다 이윽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최은철, <역사적이 않은 유물, 그리스로마운동선수> ver.2025, 라이트 박스 위 설탕캐스팅 조형물, 이소말트 & 식용색소, 가변크기, 청주시립오창전시관













